1. 사물놀이 교육
사물놀이는 전통 국악이 아니라 1978년에 급하게 시연된 현대 국악이다. 그 계기는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애정이 넘쳤던 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 사람은 건축가이면서 공간 「사랑」을 인사동에서 열었던 김수근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민속학자 심우성이다. 김수근에 의해 소위 ‘김덕수 사물놀이’의 신명풀이 판이 펼쳐졌고, 그 이름을 작명한 동시에 민속학적 해석을 담당한 이가 바로 심우성이다. 1978년 2월 어느 날 창덕궁 옆 인사동 공간 「사랑」에서는 제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 행사가 열렸다. 꽹과리를 담당하던 김용배가 제안하고 심우성이 작명을 한 사물놀이 풍물패가 최초로 연주를 한 뜻깊은 날이다. 사물놀이에서 꽹과리는 소리는 자연의 천둥에 비유되고, 장구 소리는 비, 북소리는 구름, 징 소리는 바람에 빗대어 불린다. 이 네 가지를 합해서 흔히 ‘폭풍’에 비유한다. 공간 「사랑」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자 여러 시도가 진행되었다. 1978년 2월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 연주회에서 김용배, 김덕수, 최태현, 이종대 등 네 사람에 의해 ‘웃다리 풍물 앉은반’이라는 프로그램이 최초로 공연되었다. 하지만 해금 전공이었던 최태현과 피리 전공이었던 이종대가 빠지고 최종실, 이광수가 영입되면서 비로소 완전체가 형성된다. 이들에 의해 중부지방의 가락을 엮은 ‘웃다리 사물’, 영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영남사물, 호남지방의 가락을 엮은 호남 우도, 좌도 사물, 이 삼도의 가락을 모두 엮은 삼도 사물이 나오게 되었다. ‘웃다리’는 경기, 강원, 충청 일대를 남사당 방언으로 ‘웃다리’라 부른데서 연유한다. 자연스럽게 전라도와 경상도는 ‘아랫다리’가 된다. ‘웃다리 사물놀이’에는 쩍쩍이, 칠채, 육채, 마당삼채, 짝쇠 등의 가락이 있다. 진주, 삼천포의 풍물가락을 중심으로 가락을 집대성한 것이 영남 사물놀이인데, 길군악, 반길군악, 다드래기, 영산다드래기, 별달거리, 쌍진풀이 가락이 있다. 전라도의 서쪽 해안지역을 우도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의 대표적인 가락을 집대성한 것이 호남우도 사물놀이이다. 오채질굿, 좌질굿, 풍류굿, 양산도, 세산조시 등의 가락이 있다. 그 외 호남좌도 사물놀이도 있다.
풍물놀이 즉 농악은 우리나라의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다. 1960년대까지 농촌에서는 풍물놀이를 통해 각종 촌락의 제의와 유희수단을 활용하여 결속을 다져왔다. 또 다른 유파는 유랑연예집단인 남사당패였다.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을 주축으로 한 제 3공화국은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여 ‘조국근대화’라는 기치를 내세워 전통 농촌사회의 구조를 바꾸게 된다. 이렇게 전통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기산 박헌봉을 위시한 문화재위원들은 ‘문화재보호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인간문화재 제도를 창안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현실화한 것이 ‘무형문화재’ 제도였으며 우리나라의 전통가락을 지켜오던 명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로 정착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농촌에서는 사라져가던 풍물놀이가 김덕수를 비롯한 풍물패에 의한 신명나는 공연를 통해 대중적으로 성공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기산선생의 1960년대의 문화재 위원으로서의 열정적인 활동(심우성, 홍윤식의 전문위원으로서의 뒷받침), 국악예술학교의 창립과 국악교육, 그리고 1970년대말-80년대의 박범훈교수의 시나위 소극장운동 및 김덕수 사물놀이의 세계적인 활동이 어울어져 우리의 전통 가락은 현대 국악으로 대변신을 하게 되면서 대중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기산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기산음악박물관은 야외음악당을 활용하며 앞으로 지자체와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상설 사물놀이 교육과 공연을 전개하려고 한다.